강희동 목사
강희동 목사는 1950년 9월 북한군에 징집되었고, 그로부터 열흘 뒤에 그는 미군의 포로로 잡혔다. 그는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고, 그는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중립국인 인도를 선택한 몇 안되는 전쟁 포로 중 하나였다.
인터뷰 장소: 캘리포니아페어팩스
인터뷰 진행자: 디앤 볼쉐이 림과 JT 타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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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다.]
포로 수용소에서는 세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해서 잡힌 공산당 병사들. 그리고 남쪽에서 징집된 사람들. 왜냐하면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산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무장 군인이 아닌 사람들, 즉 민간인들이요.
한국전쟁 동안, 많은 전쟁 포로들은 항복했었어요. 그들은 미국인들에 맞선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더욱 북한 정부에 대항했지요. 하지만 미국인들은 이런 미묘한 심리를 몰르죠.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북한 청년들은 적이었어요. 군인이었구요. 그래서 그들이 이 항복하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모두 포로 수용소에 수감했죠.
우리는 모두 남쪽, 부산으로 이동되었어요. 너무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천막에서 살았어요. 각 천막에는 50명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음식이라고는 그저 밥 한공기와 국 뿐이었죠. 저는 이렇게는 살아남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고 군대 병원에 머물렀어요. 그리고 저는 원조 병사가 되었죠. 3년동안, 저는 그 곳에서 일했어요.
설사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어요. 어느 날 아침, 제 천막에서 12명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천막에서의 삶에서 이념적 차이는 중요한 문제였어요.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랑 반공주의자 모두 함께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죠. 그리고 미국인들은 북으로 가고자하는 이들과 분리하기로 결정했죠. 송환을 거부하는 이들이요. 그래서 두개의 수용소가 있었던 거에요.
처음에, 휴전 협정이 시작되었을 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죠: 북으로 돌아가느냐, 남한에 남느냐.
그리고는, 당시에 그들이 우리에게 세 번째 선택권을 줄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중립국으로 가는 선택권이요.
저는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북한, 저는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는 중립국을 선택했습니다. 제 딴에, 남한에서 사는것은, 즉 북한에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더욱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겠다고 택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인도행 배에 승선했을때 그 배는 아주 컸어요. 5000명의 인도인들이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이 사진은 배 위에서 찍은거에요. 이건 저구요. 이 사람은 인도인 선장이에요.
배가 항해를 시작했을때, 모든 사람들이 갑판으로 가서 한국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어요.
[강목사의 그룹은 마드라스에 상륙하여 뉴델리로 갔다. 2년 뒤, 브라질과 아리헨티나가 망명을 제공했다. 강목사는 브라질로 가기를 선택했다. 그는 마리아 발레리오와 결혼하여 가족을 꾸렸다.]제가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50년 동안 부모님과 형제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삶의 경험이 삶에 대한 저의 불안감을 깊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뿌리 없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의 유일한 희망은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거의 불가능하지요.
[강목사는 브라질에서 45년간 살았다. 그는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그의 아내와 두 명의 딸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