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은 목사
우리는 남한, 서울의 남쪽에 살았어요…우리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았죠. 그들이 우리까지 오는데 시간이 오래걸렸어요…북한 사람들은 그냥 내려왔어요. 그때는 여름철이었구요. 그것이 끔찍한 기분이었던것을 기억해요.
인터뷰 장소: 오클랜드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우리는 남한, 서울의 남쪽에 살았어요…우리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았죠. 그들이 우리까지 오는데 시간이 오래걸렸어요…북한 사람들은 그냥 내려왔어요. 그때는 여름철이었구요. 그것이 끔찍한 기분이었던것을 기억해요. 저는 그들이 누군지잘 몰랐어요. 그냥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렸어요. 아시겠지만, 북한 군인들은, 그들은 북한 군복을 입고 있잖아요…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 자동으로 된 아주 둥근, 기관총이요. 그들은 그거랑 탄띠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게 둥근 거였어요[탄창]. 그게 정말 저를 두려움에 질리게 했어요. 그건 정말 무서운 이미지예요. 그들이 마을에 올 때마다,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그냥 두려움에 떨고 숨고…정말 무서웠어요. 그들이 제 앞에서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방식 때문이에요.
하지만, 나중에는, 각 마을에 공산당과 공산당 지도자가 있었어요. 저는 기억해요. 매일 밤, 해가 막 져서 어두워지면, 마을 사람들 모두는 한 장소로 모여야 했어요. 그들은 모여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지적받고, 아시겠지만 나쁜 일이…결국, 그들에게 나쁜일이 일어났어요. 그들은 전선으로 보내지거나, 공산당을 위해서 물건을 나르거나 노동을 해야 했을 수도 있어요.
당시에, 제 기억으로는, 제 부모님과 저 같은 작은 아이들은 그 모이는 장소에 가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야만 했죠. 저는 그들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른들은, 제 생각에, 공산당에 대해서 교육 받으셨던 것 같아요—얼마나 한국[남한]인들이, 미국인들, 그리고 남한 정부 사람들이 나쁜지에 대해서요. 그건, 말하자면 세뇌였죠. 세뇌, 반복하는거요.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종교 생활
제 아버지는 목회자이셨고, 그래서 그들은 제 아버지를 찾았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집에, 다락이라고 부르는 곳에 숨으셨죠…거기는 더운 곳이었어요. 우리는 집과 교회 건물을 갖고 있었고 집과 교회 건물 바로 뒤에는 대나무숲이 있었어요—길고, 빽빽한 대나무 숲 구역이요. 이 대나무 숲 사이로 아주 비밀스러운 길이 나 있었는데 그건 산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제 아빠는 말하자면 산 한가운데에 숨어 계셨던거죠. 그리고 저는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알았고 점심과 다른 끼니를 떼울 수 있도록 먹을 것을 날라야 했죠. 그리고 아버지는 한밤중에 내려오셨다가 이른 아침 몰래 빠져나가 다시 그 장소로 가셨어요. 그리고 저만 유일하게 아버지가 어디에 숨어 계신지 알았고, 아버지는 거기 숨어 계셨어요.
공산당원들은 당시에 목회자들을 정말 증오했어요. 그리고 우리 이웃마을 주변의 모든 목회자들을 어떤 장소로 데려갔어요. 우리 아빠도 또한 [제 할머니 댁으로] 걸어가셨죠. 당시에 별로 고속도로가 없어서 그냥 걷는 거였어요… 그렇지만 우리 할머니,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사셨고 우리 아버지는 그래서 거기로 가셨어요. 제 외삼촌과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아주 놀라셨고, 또 무서워했는데, 그 이유는 만약 누군가가 아버지를 보았다면 이 사실을 알리고 아버지를 데려가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어요. . 그래서 그 분들은 우리 아빠를 어떤 장소에 숨기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내내 숨어계셨어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아빠가 저에게 말씀해주신 거에요.
그 나라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저는 300명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은 벽돌로 된… 창고 같은…작은 창문이 달린 건물로 보내졌어요. 모두 벽돌 창고에 넣어졌어요. 제가 나중에 듣기로는 200명이 죽었다는 거에요. 아시겠지만, 지역민들과 지역 공산당원들과 이전에 잘 대우 받지 못한 지역 사람들에 의해서 대부분 행해진 거라는 점이 정말 애석했어요.이전의 기억 때문이었던 거예요. 그냥 악몽이에요, 악몽. 말하자면 선한 게 하나도 없어요… 제 생각에 아마도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필요했었겠지만,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은 같은 피잖아요. 그들이 그 사람들은 좀 더 적절하게 대우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그들을 더 좋게 수용하는 거요. 그러나 그 나라에서 그들이 한 모든 것들은 매우 끔찍하고 비인간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공산당에 대해서 어느 하나 좋게 말할게 없어요. 이게 그들에 대한 저의 기억이에요.
그들이 목회자의 가족을 지원하는 방식은 각 가족당 한 숟가락 정도의 쌀을 가져가게 하는 거였어요… 그들이 밥을 짓기 전, 항상 그들은 한 숟가락 정도를 목회자에게 주어요. 그리고는 한 주나 이 주 뒤에, 그들은 단지를 들고 교회로 와요. 그게 전부에요. 그게 목회자의 생계였어요.
전후 시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우리는 정말 북한 사람들을 증오했어요. 그게 북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었어요, 정말 싫어했죠. 그리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이 사람들, 이들은 한국 사람들이야, 알겠지만, 같은 사람들. 어떻게 그들을 증오 할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북한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이라고 조차도 그 누구도 언급할 수 없었고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한다거나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류의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는] 감정들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제가 미국에 왔을때야, 느꼈어요.미국에서의 삶
헤어진 가족들
미래에 대한 희망
네. 미국에 [온 다음에], 우리 자신들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었어요. 이건 정말 끔찍하구나,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고 있구나. 아니 그 비극으로 가족들이 헤어진 거 잖아요. 아시겠지만, 어떤 이유로건 저는 제 자신을 더, 뭐랄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불가능했던 일이에요… 그러나 제가 미국에 온 이후에는 상황이 다르죠.
아 네, 개인적으로 그것도 저의 또 다른 걱정거리에요. 저는 매우, 항상 한국의 통일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건 항상 저의 기도 제목이기도 해요—한국의 통일, 평화…화해. 저는 거기서 무언가가 이루어진게 정말 기뻐요. 남북한 정삼회담이요 [2000년 김대중과 김정일의 정상회담]. 저는 그 정상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이에요. 그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래서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애써야 해요, 한국에 있는 사람이건 해외에 있는 사람이건요.네, 그게 저와 한국인 성도들에게는 또 큰 이슈예요. 이건모든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물어보세요.
[귀하와 귀하의 아내는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십니까?] 별로요, 그런데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사나 [우리가 걸어온]길에 대해서 얘기해요—제가 어렸을 때, 제가 소년이나 소녀였을 때 얘기 같은 거 라던가. 이런 저런 장소에 대해서나.아내의 가족들은 도망쳤었어요. 아내와 모든 가족들은 도망쳤지만 아내의 조부모님들은 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아내의 부모님들은… 막내딸을 할아버지에게 남겨두고 떠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분들은 돌아오셨지만, 그 막내딸은 항상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아시겠지만—“나의 가족이 나를 버렸다.”고. 며칠 전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게 기억나요. 네, 그건 정말 상처받을만한 일이죠. 아내는 항상 그 곳에 할아버지와 함께 죽게 버려졌다고 느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