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리 맨지 목사
앤 리 맨지 목사의 아버지는 전쟁 동안 사라지셨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들의 피난 여정의 시작 시점에 태어난 갓난아이를 포함한 세 명의 자식들을 홀로 힘겹게 기르셨다.
인터뷰 장소: 캘리포니아 엘세리토
인터뷰 진행자: 디앤 볼쉐이 림과 JT 타카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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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은 저의 4번째 생일의 바로 5일 전이었어요. 우리는 아버지를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고, 그게 제가 반복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에요: 아버지가 행방불명 되었다. 그러나 제 한평생, 저의 어머니께서는 전제 이야기를 얘기해주지 않으셨어요.
2007년 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는 북한으로 올라갈건데, 제가 거기 갔을 때 아버지를 찾아야하나요? 라고 말했죠. 어머니는 안된다고 말씀 하셨죠. 그때가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떠나셨다고 말씀하신 때에요. 아버지는 겁이 나셨고 떠나셨어요.
그 당시에 사람들은 아주 혼란스러워했어요. 아버지께서도 분명 혼란스러워 하셨을 거에요.
아버지는 사회주의 단체를 지지하셨죠.
그리고 6월 25일, 북한 사람들이 내려왔고, 서울의 주요 은행 중 하나를 차지했고, 아버지께서는 북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은행을 운영하게 놓이셨죠.
그리고 9월에, 북한 사람들이 북으로 후퇴할 때, 남한 군대가 이동해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겁에 질리셨는데, 한국 군을 마주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버지는 베낭을 메고 어머니께, “돌아오겠다”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신거에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죠.
어머니는 겨우 25살이셨고, 어머니께는 두 갓난아이가 있었죠.
그리고 제 생각에는 몇 달이 지나고 어머니의 배가 부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임신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셨죠.
1월이 왔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에서 달아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양수가 터졌고 1월에 아이를 낳을 수 밖에 없으셨어요, 그 피난 한복판에서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셨는데, 사산이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다시 걷기 시작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피난 여정이 시작하게 된거에요.
그리고 어떻게 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엉터리 영어로, 한 미군이 허락하여 화물 열차에 타게 되었고, 우리 여섯은 부산으로 가는 화물 열차를 탔어요.
저는 전쟁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가난했어요.
우리는 단 한번도 충분히 무언가를 가진적이 없었어요. 자주 우리 주변에 충분한 먹을거리가 없었구요.
저는 원하지 않아하는 것을 배웠어요.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냥 원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어요. 원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저는 한참 지나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려움, 가혹함을 다루는 어머니의 방식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1950년대에서 60년대 초기에, 만약 아버지나 형이 자발적으로 북으로 갔다면, 그 가족들은 어느 정도 위험하거나 “빨갱이로” 낙인되었어요. 제 생각엔 그래서 별로 어머니께서 절대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것 같아요. 물론 어머니께서 수만개의 이야기 거리가 있으시겠죠. 하지만 말씀 안하세요. 그냥 쥐고 계세요. 그래서 슬퍼요. 그런데, 그래서 어머니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요.
오늘날의 어머니는 어머니이신거고,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