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 킴
2세로서,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가족들이 여기에 없는 저로서는, 부모님이 가끔씩 하시는 아주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어요.
인터뷰 장소: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전쟁의 유산들
2세로서,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가족들이 여기에 없는 저로서는, 부모님이 가끔씩 하시는 아주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사람들이 모여서 북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세요. 이 특정한 경험이 저희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냐고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부모님 중 적어도 한분이 이북 출신인 친구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그래서 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정말 얘기 하지 않았고, 뭐, 그 쪽 가족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렇죠? 제게는, 정말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전쟁 전 시기
가족의 이별
아버지의 삶에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아버지께서 열여덟 살에 북한을 떠나신 거에요. 그땐 전쟁 전이었어요. 아버지는 1927년에 태어나셨으니까…러시아가 북한으로 진군해 들어간 직후 였는데, 우리 가족이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아시겠지만, 모든 것을 잃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떠나야할 것 같다고 느끼셨고, 떠나고 싶어하셨어요. 아버지의 형은 먼저 떠나셨고 아버지가 그 뒤를 따랐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떠난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최근에서야 아버지 가족들과 재결합 하셨어요. 세 번 정도 만나러 가실 기회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마지막에야 가셨어요. 작년이었죠. 그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가 떠나신지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되셨죠. 아버지는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것 자체를 탓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가셨는데, 아버지의 모든 형제자매분들은 어머니가 올해 초에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살고 계셨어요.
미국에서의 삶
친가 쪽으로, 저는 제 사촌들과 만났어요. 사촌 중 하나가 장손이었다는 것이 지금 막 기억나네요—아빠의 형이 장남이셨거든요. 아빠는 차남이셨고 그리고 장남은 거기[한국]에서는 가족의 책임자 같은 거잖아요. 사촌의 영어가 짧았기 때문에 서로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정말 기를 쓰고 노력했어요., 지금 막 기억난 건데, 사촌이 자기는 단 한번도 북한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몽유병에 걸린 기분이라고 말했었어요. 사촌은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단 한번도 보지 못한거예요…그리고 그건 정말 제 인상에 깊이 남았어요, 왜냐하면 어쨌거나 그는 한국에 있잖아요. 그런데 남한에 있는 사람[은 북한을 방문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촌은 여전히 그렇게 느꼈던 거에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그 몽유병에 대한 이미지는 정말…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우리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뭐, 제 생각에 어머니는 그냥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으 것 같아요. 어머니는 틀림없이 한국을, 한국에서의 많은 경험들을 잊고 싶어하세요. 제 생각엔 어머니, 어머니의 가족 때문인것 같아요. 음, 아마 일제하에서의 경험 약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겠죠, 그리고 저는 어머니가 심지어 공산당 시위대의 한 일부였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난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공산당 시위에 있었어.” 저는 어머니께서 그게 그냥 재미있어 보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나 명백히, 어머니는 어떤 방식으로건 공산당과 연루되어 있었어요 시위에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니는 정말 이거에 대해서 말씀 안하세요.
전후 시기
네, 아버지는 교회에 관여하셨어요.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셨는데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오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신거에요. 그리고는 그 기회를 잡으셨죠. 그리고 저는 제 어머니 쪽에 별의 별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아요. 어머니의 아버지께서 특히 제 아버지를 싫어하셨는데, 이유는 아버지께서는 이북 출신이셨고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온갖 갈등이 연루되었고 저는 어느 날 언젠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실제로 미국으로 떠나오셨을 때, 아버지는 가족에게, 그러니까 우리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 오신다고하셨는데, 그때 외할아버지는 “봤지, 그애[사위]는 너를 떠날거다”라고 하셨다는 것 같아요
전쟁의 유산들
그런데 아시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제 생각에, 수많은, 아니, 한가지만 말하자면, 이 모든 피난민 경험이 매우, 엄청난 영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난민이고 피난민의 자식들이 되어요—. 제 생각에는 그냥 이에 대한 정말 엄청난 부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 모든 아시아인들의 이민 경험은, 마치, 사람들이 알다시피, 모두 더 나은 기회를 위해서 왔다는 이 모든 모델 마이너리티 개념인것 같아요. 제 말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고 그건 정말 제 마음에 거슬려요… 아니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얘기하지 않나요?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걸까요?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여기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제 말은, 저는 제가 한국 전쟁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