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경숙 대니엘스
저희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열일곱 살 때 결혼하셨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당시에 한국이 수년간의 가뭄을 겪고 있어서서 먹을 게 없었고모두가 나무 껍질을 벗겨서 잎이랑 먹었다고 하셨어요.
인터뷰 장소: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일본 식민지 시대
저희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열일곱 살 때 결혼하셨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당시에 한국이 수년간의 가뭄을 겪고 있어서서 먹을 게 없었고모두가 나무 껍질을 벗겨서 잎이랑 먹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나는 여기 가만히 앉아있지 않을 거야”라고 말씀 하셨대요. 아버지께서는 꽤 영리하셨던 것이 분명해요.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가셨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중국, 만주에서 태어난거에요—저, 두 명의 오빠들과, 언니, 그리고 여동생 모두가요.
몇년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돈을 모아서 농장을 사셨어요. 그 누구도 어떻게 사셨는지는 말을 안해주었죠. 이건 그냥 저희 어머니께 들은거에요. 아버지는 만주에서 일본인들의 죽임을 당했어요. 저는 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위해서 지하에서 일을 하셨다고 믿어요. 저는 어머니께 여쭈어봤지만, 어머니께서는, “나는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도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셨어요. 당시에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일본인들이 와서 아내를 두들겨 패면 아내가 모든 것을 말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걸 하셨다는 것을 제가 아는 이유는 수확하실 때마다 아버지가 쌀을 가지고, 마치 수출을 하듯이, 북한으로 가셨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거기 도착하시면, 아시다시피 소식과 정보들을 공유하시고 돌아오시는 거에요. 제 생각에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무기와 식량을 위해, 돈을 대는 사업가들이랑 농민들을 주로 도와주는 중간자였던 것 같아요.
한번, 아버지가 돌아오셨을때—그때가 비오는 날이었는데—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흠, 나가서 논을 살펴봐야겠다.”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 중 하나를 데리고 우산을 들고 나가셨어요. 어머니말에 따르면 그 날은 어두운 오후였대요. 그리고는 일본인과 한국인 경찰들이 와서 우리 어머니께 남편이 어디로 갔냐고 물었어요. 어머니께서는 그들에게 배수에 문제가 있어서 논을 보러 갔다고 말했어요. 그게 어머니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에요. 우리는 심지어 아버지의 시체도 찾지 못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어요.
어머니는 혼자서 우리들을 기르시느라 엄청난 어려움을 겪으셨어요—밥 한 그릇씩을 파시면서, 사람들을 위해서 세탁과 바느질을 하시면서요. 우리는 항상 충분히 갖질 못했어요. 제 말은,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다섯명이잖아요. 사실, 어머니께서는 10명의 아이들이 있으셨는데 오직다섯 명만 살아남은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런식으로 살았죠.
그리고, 당시에, 장제스랑 마오쩌둥이 싸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지역의 중국인들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들이 시킨 더러운 일들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을 죽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일본이 항복하였을때,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화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떠났죠.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일본이 항복하였을때, 저의 둘째 오빠가 우리 나라로 돌아간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오빠는 평양으로 갔고 거기에서 정착했어요. 그리고 제 생각에 오빠는 당시에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 같아요. 그리고 오빠는 우리에게 오라고 했죠. 그래서 어머니와 큰 오빠, 그리고 올케와 우리 언니, 형부와 조카와 언니의 시어머니, 그리고 제 여동생까지 우리는 모두 거기로 내려갔어요. 그때가 1946년이에요. 저는 열두 살이었구요.
당시에 그들은 식량을 배급했고, 그래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그들이 충분한 식량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물론, 여전히 일을 해야만 했죠. 어머니와 우리 언니는 대학에서 일을 했어요. 어머니는 요리사였어요. 그런데 학교가 모두 공짜였어요. 교복은 모두 순면이었구요. 그 누구도 그 비단옷을 입지 않았어요. 그들은 부자들에게, “너는 그걸 [비단옷을]입을 수 없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해야한다”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그들을 좋아했는데, 아시다시피 우리가 가난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같은 옷을 입었고 그들은 책들을, 공짜로 주었어요. 전쟁이 발발했을때, 저는 막 중학교를 마쳤어요.
가족의 이별
도시에서 전쟁이 있을 거였고, 제 형부는 “우리는 이사를 가야 한다”라고 말했어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우리 마을로 내려왔다고 말했고, 삼일 뒤에, 미국인들은 철수 했어요. 도시에서 전쟁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제 형부는, “우리는 이사를 가야 한다”라고 말했고요. 1950년 12월 5일, 제 언니와 형부, 그리고 세 명의 조카들과 저는 평양을 떠났어요. 우리는 폭격으로부터 며칠만 피해있는 거라고 생각했죠. 언니의 시어머니도 함께 왔어요. 저는 열여섯 살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아이 하나를 제 등에 업혔죠. 언니는 갓난아이 하나를 업었고 형부는 네 살 된 아이를 업었어요. 여동생은 올케랑 같이 있었는데 우리랑 같이 오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올케가 여동생 팔을 잡아 끌면서 자기 혼자 남겨지면 무서울 거라고 했고, 형부도 저를 가자고 끌어당겼어요. 형부는 자식들 중 하나를 제 등에 업히기 위해서 제가 필요했던 거에요. 그래서 여동생이랑 저는 울었죠. 우리는 이별하기 싫었지만 올케는 우리가 며칠 뒤에 다시 돌아올거니까 여동생을 두고 가라고 했어요. 이것이 그 때 일어난 일입니다.
나중에 저는 여동생이 어머니랑 올케, 그리고 올케 아이들이랑 함께 폭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저는 제 형부가 제 여동생으로부터 저를 끌고 간 것을 절대로 잊지 못했어요. 거의 40년동안 형부한테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지만요.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피난민 도피)
우리 마을은 유령 마을이 되었어요. 우리가 강(대동강)을 건넜을때, 거기에 카누가 있었죠.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탔어요. 너무 가득 차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그래서 사람들은 얼음을 깨면서 우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냥 전쟁이었어요, 사람들은 소리지르고 고함치고. 우리는 다 젖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갔는지 모르겠어요. 저녁에 우리는 어떤 마을에서 잠을 잤지만 그 마을도 유령 마을이긴 마찬가지였어요. 만약 멀리 있는 마을이라면, 더 좋은 식량을 얻을 수 있어요. 만약 큰길에 가까운 마을이라면, 거의 음식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매일 아침 일찍, 새벽 여섯 시부터 걸었고, 어두워지면 다른 마을로 가기 시작했어요.
우리 언니의 아기는 많이 울었는데, 갓난아기였기 때문이에요. 언니의 시어머니는 아기를 버려야될거라고 계속 말씀하셨는데, 아기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에요. 시어머니는 공산당이나 다른 사람이 아기우는 소리를 듣고 우리를 찾을까 봐 무서워하셨어요. 그리고 우리 언니는 아기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울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개성[38선 근처의 도시]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언니의 시어머니의 친구분이 근처에 계셨고 거기서지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 기분이 나아졌죠. 그리고는 우리 여섯만 남았어요. 우리는 그런식으로 스물 여덟 날 동안 걸었어요.
우리같은 사람들이 수천 명 있었어요. 수천 명! 저는 언니의 아들을 제 등에 업었고 그 아기는 제 등에서 소변을 봤는데, 아시겠지만, 등이 뜨거워졌어요. 저는 울었고, 정말 화가 났어요. 저한테 지팡이가 있었어요. 그 애를 때리려고 했지요. 저는 그 애에게 “내 등에 오줌 싸지 마!” 라고 했어요.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애의오줌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걸 봤어요. 저는 그 애를 때렸죠. 그러자 사람들은 저에게 화를 냈는데, 제가 실제로 때리고 있는 건 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 정도로 서로 딱 붙어서 걷고 있었던 거예요. 몹시 붐볐지요. 심지어 멈출 수도 없어요. 뒤에 있는 사람들이 화를 내기 때문이었죠. 사람들은 그저 거기서 벗어나려고 서두르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임진강으로 왔어요. 거기에는 미국인 병사들, 한국인 병사들, 그리고 한국[남한]인 여경이 있었어요—모두 거기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향해 총울 겨누면서,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왜요?”라고 말했죠. 그들은 “북한 병사들 때문이다, 누가 군인이고 아닌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모두가 서서 소리지르고 고함쳤어요. 그리고서는 모두가 말했죠, “이봐, 우리는 갈꺼야! 우리가 여기서 죽든지 건너다 죽든지.”
강은 완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깨졌어요. 저는 결국 건넜긴 했는데 제 형부는 형부 아들이랑 가라앉았어요. 저는 건너 뛰어 가서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끌어당기면서, “넌 너무 무거워. 그러다가 얼음이 깨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건널 수도 없을거야”라고 했어요. 저는 듣지 않았죠. 저는 그냥 건너 뛰었고 넘어졌어요. 제 조카는 뒤에서 끈으로 묶는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저는 겨우 그것만을 잡을 수 있었고 제가 그 애를 끌어 올리는 동안,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어요. 제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목이 졸렸던 거예요. 그리고서는 미군 한 명이 와서 저를 도와 그 애를 끌어냈고 제 형부도 끌어냈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 어떤 무기라도 있는지 보려고 우리 몸 온 곳을 뒤졌어요. 그날은 크리스마스였어요.
그 이후로 우리는 영등포에 왔어요. 거기엔 유개화차가 있었는데 두가지 길로 갈 수 있었어요. 서울로 가거나 아니면 남쪽으로 가서 부산이나 대전으로가는 길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 위로 올라갔는데. 아기들 때문에 천천히 올라갔어요. 우리는 거기서 열차의 위쪽 구석 앉아 사흘을 보냈어요. 열차가 멈추었을때, 갑자기쿵 하고 나서 뒤로 후진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기차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 형부는 우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묶어놨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대전으로 내려왔고 약 닷새 정도 머물렀어요. 그러자 거기 사람들은 “이동해야 해”라고 다시 말했죠. 그래서 우리는 열차에 탔고 이리라는 작은 마을로 내려갔어요. 우리는 거기의 피난민 부락에서 삼 년 정도 지냈어요.
전쟁의 유산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제 경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요. 왜 제가 사람들한테 얘기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제 생각엔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얘기하길 좋아할텐데 자식들은 관심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 저는 애들을 기르느라 너무 바빴어요. 이제 저는 제 딸한테 조금씩 말해요. 딸은 믿질 못했어요. 저는 딸에게 가끔 이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해 줘요: “그래, 내가 이러저러한 일들을 했어.” “아, 엄마,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어요?” 아시겠죠.
왜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딸에게 조금씩 말해요. 그래서 제가 북한에 가려고 할때마다, 딸애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요. 제가 편지를 받을 때마다, 딸애는, “엄마, 삼촌으로부터 편지 왔어”라고 말해요. 딸애도 제가 항상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거지요. 만약 딸애가 알았다면, 아마도 제가 왜 이렇게 사는지를 이해했을거에요. 제가 이 프로젝트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어린 세대들을 위한거에요. 이 역사는 매우 중요해요. 우리가 이들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잊혀질거에요.
그 전쟁은 오랫동안 저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제 아이들이 자랄 때, 저는 아이들의 친구들이나이웃들을 집으로 부르곤 했어요. 저는 전쟁 중에 내내 배고팠기 때문에, 아이들이 놀 때 저는 항상 애들에게 과자를 주려고 했어요. 저는 아이들을 먹이려고 했던 거예요. 저는 항상 제 아이들에게 애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려고 했는데, 이유는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딸애의 친구들이 갈 시간이 되면, 저는 “좀 더 먹어라. 더 먹어, 알겠지?”라고 해요. 제 딸은 제가 한국 엄마이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들은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역사를 회고해보면, 저는 제가 이러는 이유가 우리가 한번도 충분한 음식을 가져본적이 없기 때문에, 너무 여러해 동안 음식없이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제 미국인 같아요. 저는 그러면 안되지만 음식을 버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때로는, 지금도, 음식을 냉동하려고 냉동실에 넣으려고 하기도 해요.
저에게 있어서 전쟁은 또한 가족 없이 사는 것이었고 저에게 뭘 해야 한다고 말해주거나 저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을 의미해요. 제 일생 동안 저는 항상 혼자였고, 스스로 했어요—의사 결정하는것, 그 모든 것을 제 스스로 했어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 조차도요.
미국에서의 삶
그래서 저는원형으로 한 바퀴 돌았던 셈이죠—중국, 북한으로 갔다가, 오산으로 내려가서, 그리고 서울로, 그리고 미국으로, 다시 북한으로. 네, 우리는 여기 왕국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가 겪은 것에 비하면 여기는 왕국같아요.어려운 시절이었어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며 산다는 것은 잘 알지만 우리 만큼이나 고생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으니까요. 그때가 고생의 시작이었어요.
이건 모두 고통스러운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 안에는 기쁨이라고는 없어요. 때로는 잊고 싶기도 하지만 그냥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자러 가서, 누워있는데, 그리고 잠이 안 올 때면 저는, “뭐, 만약 내가 뭔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나의 삶도 달라졌겠지”라고 말해요. 하지만 선택이 없었어요. 저는 그 어떤 것도 다르게 선택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배운 적도 없었고, 살아남느라, 사느라 너무 바빴어요. 매일, 매일. 아침을 만들지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먼길을 온거죠.
[Portions of this interview are taken from “So I’ve Gone Around in Circles: Living the Korean War,” Amerasia Journal 31:3 (2005): 15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