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킴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4명이에요. 우리가 이민왔을 때 저는 열두 살 이었어요. 우리는 이민이 최고조로 밀려들던 76년에 이민 왔어요. 시카고로요. 외가가 있었는데, 그 중 몇분이 시카고에 살고 계셔서 우리는 외가 쪽으로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던 셈이죠.
인터뷰 장소: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 (인터뷰 당시)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미국으로의 이민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4명이에요. 우리가 이민왔을 때 저는 열두 살 이었어요. 우리는 이민이 최고조로 밀려들던 76년에 이민 왔어요. 시카고로요. 외가가 있었는데, 그 중 몇분이 시카고에 살고 계셔서 우리는 외가 쪽으로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던 셈이죠.
네, 우린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가장 맏이인 저는 열두 살이 었고, 막내인 남동생은 당시 여섯 살이었어요. 우리는 힘든 시간을, 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의 트라우마적인 시간들을 겪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유색인종이었고, 뭐 그런 식이었죠.
우리 외가쪽으로는 우리 세대 중에서 제가 가장 맏이에요. 친가 쪽에서는 북미의 사촌들 중에서 제가 맏이이구요. 저만 유일하게 두개 언어를 할 줄 알아요. 그리고 저는 역사 전공인데, 제가 한국으로 돌아갔을때, 우리 부모님의 친구분들을 통해서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어요… 이제 올해로, 저의 모든 조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셨네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가 돌아가시면, 저는 이 모든 사촌들과는 별로 공감대가 없을 것 같고, 우리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없을 거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씩이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도 기록하고 싶은 거죠.
전후 시기
저는 제가 열두 살때 까지 한국에서 컸어요. 초등학교 때, 우리는 실제로 [unintelligible]라고 불리는 특별 수업을 받았어요. 그 수업명은 윤리 생활인가 하는 뜻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주로 북한에 대한 정치적 선전이었고 교과서에서는 실제로 북한 사람들을 비인간적이고, 거의짐승에 가까운 무언가로 묘사하고있었어요. 그들은 항상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고, 언제나 흉악하게 묘사되어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자라왔고, 우리는 서울이, 그, DMZ?로부터 몇 마일이나 떨어져 있건 간에, 항상 또 다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어요. 전쟁이 일어났던 6월 25일쯤이 되면 우리는 항상 특정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대한 것과 우리가 왜 이 전쟁에 대해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지에 대한, 그런 것이었어요.
어느 날, 제가 자고 있었는데 시끄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던 게 기억나요. 우리집 문은 아니고 어딘가 이웃집 문이었어요. 정말 두드리는 소리가 컸는데, 아마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였겠지요. 하지만, 한밤 중에 그런 식의 시끄러운 문 두드리는 소리요. 즉시 저는 북한사람들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아래층의 부모님 방으로 냅다 달려갔던 기억이 나요.. 제 형제자매들과 제 방에서 자기에는 너무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그 정도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경각심의 수준이었어요..그 정도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선전을 항상 들으면서 살았어요.
전쟁의 유산들 (할아버지)
종교적 삶
만약 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우리 가족은, 우리는 항상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할 그 어떤 이유도 정말 없을 거에요. 이것은 우리 가족의 자부심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유괴되셨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으로서 순교하셨거든요.…제 부모님과 제 모든 삼촌들은—즉 그분들이 한국에 살고 계셨을 때—여전히 서울 한복판에 있는 그 교회에 가셨어요…이 교회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가 그의 믿음 때문에 돌아가셨을 때 [다니셨던 곳이에요]…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때문에…그리고 이것이 전쟁 중에 발생했기 때문에, 전쟁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지속적인 존재감이 있었죠.
제 말은, 이것이 항상 우리 가족의 일부였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제가 전쟁이 항상 우리 머릿 속에 떠다녔던 이유인 것 같아요… 제 아버지는, 아버지는 제 생각에 당신의 아버지가 잡혀가셨을 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정도 이셨을 거에요. 그래서 가끔 저는 우리 아버지가 그 때 이후로 아버지 없이 자라셨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전쟁이 항상, 정말 중요한 시점이었다는 걸 잊어버려요. [그 시점이] 우리 할머니가 다섯 명의 아들을 키우시면서 정말, 정말 어렵게 살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절대 구체적이진 않았어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이야기는 해 주지 않는 거에요. 그건…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는 한 신비로운 인물에 대한 것이고, 그리고 대체로 우리도 질문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거의 접근 불가능한 주제인 것 같았거든요.특히 제 할머니께는 너무 고통스러운 주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꽤 오랫동안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실 열세 살 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그게] 우리 아버지에게 어떤 종류의 영향을 미쳤을까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한참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이런것들을 깨닫지 못했죠. 그리고 나중에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부모에게 물어보려고 노력했어요.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어머니)
어머니의 오빠와 아버지가 북한 군에게 징집될까 두려워 숨어 지내셨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동안은 어머니께서 그 분들이 실제로 끼니를 때울 수 있게 과일이든 뭐든 팔아서 집으로 돈을 가져오는 역할을 해야 했어요. 그리고 제 생각에 어머니는 항상 씩씩한 분이셨던것 같아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그건 마치 완전 어머니의소명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 시절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절대로 그게 정말 심한 고난이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지 않으세요. 제 말은, 어머니는 말씀을 하셔도 당신께서 이 모든 과일을 머리에 이고서 몇 마일이고 걸어야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하시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시지만, 어머니의 기억들은은 오히려 애정 어린 추억들이거나 아마도 [그 당시의]독립성에 대한 것 같은 거였어요. 어머니가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하시던 시절이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말 모든 기회들에 대한 감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자신감과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라던가, 필요하다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어머니가 절대 갖지 못 했을 그런 성격을 갖게 되셨죠. 어머니는 만약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지금의 성격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 말은, 제 할머니 또한, 뭐라고 말해야할까요, 할머니는 성 역할에 대해서 아주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계셨고, 제 생각에 할머니는 정말 그걸 당신의 아들들에게 강화하셨던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의 아들들은, 물론, 그들의 아내가 시어머니만큼 되지 못할 거라고 말하겠죠. 그래서 제 생각에 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은 정말 성차별주의자가 되신것 같아요. 그 분들의 아내분들 중에자기들의 어머니처럼 훌륭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죠. 그래서 제 생각에 제 어머니와 고모들은 그냥, 이 불가능한 싸움을 하고 계신것 같아요. 제 말은, 제가 할머니에 대해서 더 잘 알았으면 좋겠지만, 제가 알 것 같은 것은, 물론 그 분이 훌륭한 분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제 생각엔 만약제가 할머니에 대해서 더 잘 알게된다면, 아마 우리는 큰 언쟁을 벌이곤 했을 거예요.
전쟁의 유산
가족의 이별
나라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내전중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유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정치적 이해의 대부분도 여기서 온 거겠죠. 제 생각에 제가 의문을 갖기 시작하게 된 것은북한과 남한에 대해서 배운 것이 정확한 그대로가 아닐 수가 있겠구나라 것을 발견하면서부터인 것 같아요아시잖아요,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다른 여러가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잖아요… 물론 제가 그 시절을 살았던 것은 아니더라도, 이건 마치, 제가 들은 모든 것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말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그리고 해외에서도 계속되었던 일종의 세뇌의 결과물 같은 거예요.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노동 운동가들과 여성 운동가들과 얘기를 하면, 그 분들의 정치적 견해, 그리고 세계관은 이 나라의 분단과 이 나라에서 미국의 군국주의와 많이 연관되어 있어요. 그리고 더 깊은 수준에서, 한 국민으로서, 한 국가로서,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에 대해서는, 아시다시피, 한 국가가 분단되고, 가족들이 분열되고, 나라 전체가 완전히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되는 것은 정말 극도로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저는한국전쟁이 가진 영향을 과소평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여기서 개최했던 북한과 남한에 대한 심포지움에서, 그들은 어떤 오래된 한국 노래를 예배실 지하에서 연주했고 저는 [inaudible]옆에 앉아있었어요. 우리는 같은 노래를 불렀답니다. 저는 정말, 저는 정말로 감동 받았어요. 그건 마치 전쟁 이전부터 부르던 같은 노래를 우리가 함께 부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은 모두 여전히 이 노래를 불러요. 그리고 이걸 함께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