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태

또 다른 큰 문제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요리를 하기 위해 땔감으로 쓸 목재조차 찾기가 어려웠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느 날 저는 폭발하지 않은 네이팜 통을 발견했는데 [우리의 터널로 가지고 왔고] 바닥에 큰 구멍이 있었어요.

세대: 1세대
인터뷰 장소: 남가주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또 다른 큰 문제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요리를 하기 위해 땔감으로 쓸 목재조차 찾기가 어려웠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느 날 저는 폭발하지 않은 네이팜 통을 발견했는데 [우리의 터널로 가지고 왔고] 바닥에 큰 구멍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통을 바닥에 내리쳤고 끈적한 물질이 계속 나왔어요. 아주 작은 한 조각만 있어도, 그것으로 밥을 지을 수 있어요 . 그만큼 강한 불이었어요. 저는  통을 계속 내리쳤는데 갑자기 제 바로 앞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그 파편이 제 뺨에 박히면서 저에게 화상을 입혔어요! 터널의 다른 쪽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저는 그 구멍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죠,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리고 저는 기절했어요. 아버지가 오셨을 때, 화가 나셨던게 아직도 기억나요. 터널 근처에 노파 한 분도 계셨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오시는 대신 그 노파에게 가셔서 그 분이 괜찮은지를 먼저 확인하셨어요 [웃음]. 그리고 그 다음에 제게 오셨죠.

저는 인천에서 경찰이셨던 제 고모와 함께 지냈는데 고모도 마찬가지로 혼자이셨어요. 약 두 달 정도가 지나고 나서, 저는 먹을 것을 살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일을 한거에요. 고모는 제물포라고 불리는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제 일거리를 찾아주셨어요. 그 곳은 비어있었는데 주로 임시 거처를 위해서 이용되었어요. 미군들이 전선으로 가거나 전선에서 돌아올 때 거기서 며칠 동안을 지내다가 미국이나 남쪽으로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그런 식이었어요. 모든 교실들은 미군들을 위한 침실이 되었고, 어떤 한국인들은 취사병으로서 그들의 부엌을 운영했어요. 많은 한국인들이 그걸 했는데, 저는 그들을 아주 부러워했어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기와 코카콜라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코카콜라 병을 맛본 거에요 [웃음]. 제 일은 2×4 인치의 건축용 목재를 커다란 짚 가마니에 넣는 거였어요. 학교들에는 항상 넓은 운동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잔디가  없고,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모래만 잔뜩 있었어요. . 그래서 저는 이 가마니를 원을 그리면서 끌고 다녔어요. 그래야 좋아보이거든요. 제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제 생각에 그들이 저에게 매일 아주 조금씩 쌀을 줬던 것 같아요. 저는 제일 어린 노동자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내와 아이들을 뒤에 두고 온 피난민들이었어요.

이번에는 재미있는 이야기에요. 이 병장은 항상 막노동을 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욕설을 하면서 때리고 발로 찼어요—“시발 새끼”. 부엌일을 하는 남자들은 항상 먹을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보다는 저희에게  주었어요—남은 음식을요. 우리는 그들에게, “그 사내는 그냥 한국인들을 싫어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그 부엌일 하는 남자가, “이에 대해서 뭔가를 합시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정말 웃겼어요. 당시에 아무도 샴푸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비듬이 있었어요. 부엌일 하는 남자는  병장을 위해서 큰 접시에 담긴 음식을 준비했고,  비듬이 유난히 많은 다른 남자 하나가 많은 양의 비듬들을 음식에 넣었어요.  맞아요, 비듬은 전혀 안 보였죠.. 그래서 이 사내가 먹었는데, 다음 날—운동장 바로 구석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그 사내는 거의 거기서 잠을 자다시피 했어요. 거기서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 사내는, 그걸 뭐라고 하더라, 설사병에 걸린 거에요. 설사! 제 말은, 그가 거기 그냥 살았어요. 며칠이 지나고 저는 그가 어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우리가 그렇게 하길 잘 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요. 어떤 사내들은 친절했고, 공평했어요. 그런데 그 사내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항상 화가 나 있었고,  특히 우리 아버지같은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어요.  그 사내는 항상 사람들의 엉덩이를 항상 발로 찼어요.

시발새끼, 후레자식”라고 하면서요. 저는 정말 싫었어요. 모두가 싫어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한거에요.

전후 시기

제가 서울로 가고 나서, 저는 다시 많은 교회들을 보았어요. 모든 모퉁이 마다 교회가 있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사기꾼들이 많았기 때문에요. 많은 나쁜 사람들이 하얀 옷깃이 달린 옷을 입고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을 미군 기지로 데려갔어요. 그리고는 “저는 목회자입니다. 제 근처에는 많은 고아들이 있어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만들거에요.”라고 말하는 거에요. 다음 날에, 다섯 대, 열 대 트럭 분량의 2×4인치 건축용 목재들과,텐트와 모든 것들이 들어와요. 그러면 그는 거기로 다시 가서, “식량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해요.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사기꾼들이에요. 교회와 고아원을 위해 많은 돈이 쏟아부어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갔고, 그 동안 어떤 사람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 가고 있었어요.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저 10센트 중 2센트만 쓰고 나머지는 그들의 주머니에 넣었어요. 너무, 너무, 너무나도 멍청해요.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미국으로의 이민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 꿈꿨어요. 자이언트(1956) 라는 영화를 보면, 록 허드슨이나 제임스 딘이 빨간 스포츠 카에 타고 식당이랑, 커피숍에 있으면 그 싱크대 옆에 서서 천천히 접시를 닦는 사내들이 있잖아요. 저는 레스토랑이  그렇게 생겼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건 쉬운 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이봐, 만약 트럭 운전을 하면, 한시간에 10달러 이상을 벌 수 있어”라고 했어요.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생각했어요. 제가 여기 왔을 때, 그건 완전 다른 이야기였지요! 저는 여기 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한 방에 남자 다섯이서, 정말 무슨 농장 노동자들 같았죠.

샌프란시스코는 여행 도시에요. 그래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가능한  일거리라고는 호텔이나 식당일밖에없었죠. 주로 설거지나 야간 청소나 식당의 잡일을 하거나, 또는 웨이터나 벨보이를 하는 거에요. 저는 그런 데서 일을 했고,학교에 갔어요. 저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학부를 다녔고, 그 이후로는 대학원에서 경제학으로 바꾸었죠. 저는 거의 몇 개의 수업을 제외하고 거의 수업과정을 마쳤었어요.. 그런데 그 때는 1971년으로,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죠. 일자리가 없었어요. 한 명이, 제 기억으로는 화학과 박사과정생이었는데, 그 사람이 온 곳곳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모두 퇴짜맞았다는 거에요. “죄송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나는 늙어가는데, 이런. 학위가 있어 봤자 뭐하겠어?” 누군가가, “연방 정부에 소영업을 지원하는 부서가 있는데 그들이 보장된 대출금을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지원했죠. 가게를 하나 열었는데, 주류 판매소였어요. 그는 5만불을 달라고 했어요. 저는 크로커 은행에 지원했어요. 저는 아직도 이 양반, 부사장을 기억해요. 그는 “뭐, 당신이 아직 미혼이고, 일 경험이 없고, 자산도 없으니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죠. “뭐, 제가 자산이 있다면, 당신에게 오지 않았겠죠. 미혼인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뭐, 경험은, 이봐요. 만약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마다, 경험이 없어서 문제라고 하신다면 대체 …” 그리고는 저는 그의 비서를 찾아서, “이봐요, 이 양반이 미혼인가요 기혼인가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녀는 그가 이혼했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래서 다음에 제가 이 양반을 만났을 때, “결혼 했나요?”라고 물었고, 그는 “네, 그랬었는데 지금은 싱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싱글이에요.” 그리고 물었죠. “당신이 싱글이기 때문에 부사장이라는 직업을 갖는데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아니요, 문제 없습니다.” “그럼 왜 제가 미혼인것에 대해 걱정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씩, 그는 마침내 저에게 대출금을 주었답니다. 그래서 주류 판매소를 인수하고 삼 년에서 사 년정도 지냈죠.

미국에서의 삶

때때로, 제 아내와 아이들과 운전하고 돌아다닐 때 딸 하나가 제게, “아빠, 궁금해서 그러는데 전쟁은 어땠어요? 전쟁 전에는 뭐하셨나요?”라고 묻곤해요. 제가 처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는 쉽지 않았어요. 그냥 “괜찮았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당시에 저는 “이런거, 저런거. 그리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정도로만 말해줬어요. 그냥 조금씩, 해방에 대해서, 그리고 미군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 그러면 약 30초 뒤에, 아마도 20초 뒤에 아이들이 주제를 바꿔요 [웃음]. 그래서, 저는 “애들아, 만약 너희들이 관심없으면 그런 질문을 더이상 하지 말렴. 나는  그냥 아무 이유없이  이야기를 길게 한 게 아니야. 아주 조금이라도 배경지식이 있어야해.” 그러나 아이들은 못 기다리죠, 10초나, 15초쯤 지나면, “아빠, 밖에 저것 좀 봐요!”라고 해요.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전쟁이 남긴 유산

전쟁은 꽤 달랐어요. 한국 전쟁 때, 삶은 너무 쌌어요. 아주 쌌죠. 매일 폭격이 있었어요. 그냥 짐승이 되어요. 항상 어디에 숨을지를 고민하구요. 그리고 폭격이 시작되면, 갑자기 한 시간 전에 만난 친구들이 죽어있어요. 매일이 그랬어요. 그런데 당시에, 저는 친구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애도할 시간이 없었어요. 저 자신의 생존을 생각해야만 했거든요. 당장 저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애도할 시간이 없는 거에요. 제 말은, 너무, 너무 멍청하다고요. 그런데어쨌거나, 생존 본능이란 아주 강한 것이더라구요. 한번은 폭탄이 저한테 아주 가까이서 폭발했었어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본인이 죽을거라고 생각하죠. 모든 종류의 파편들이 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 때 이후로, 거의 매일 저의 양쪽 고막이갑자기 막혀서 바깥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될 때가 있어요. 한 일분정도 그랬다가 또 사라져요. 그런게 삼십년, 사십년, 오십년 지속되었네요.

그런데 한가지, 이런 모든 폭력, 불필요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건 그 심리가 더욱 부정적으로 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희미해져 가지만, 제 생각에 시체와 폭격, 그리고 살인을 경험하고, 삶이 얼마나 저렴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하고,  본인이 언제 죽을지 혹은 친구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경험한 사람들은—뭐랄까, 삶에 대해 비관적으로  본다고 해야 하나. 이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하진 않지만, 아주 깊은 속에는, 그냥 나는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거죠. 나는 정상적인 칠순, 여든을 살 수 없을거야. 아주 깊은 속에는, 저는 그렇게 느껴요. 그냥 전반적으로, 삶이라는 게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거. 행복은 언제든 마음을 떠날 수 있다는 거.

전쟁이 남긴 유산

미국에서 그 어떤 전쟁 경험 없이 미국에서 자란 어린 아이들은 달라요. 그런데 제 나이의 한국 사람들은 더욱 인내심이 있지요. 뭐라고 하지요, 불도저 같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죠, 이런식, 저런식으로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 없어요. 그냥 일을 하는 거에요. 전쟁이 그래요. 그냥 사람들을 밀어붙이는 거에요. 살아남기 위해서 뭐라도 하라고 밀고, 또 미는 거에요. 한국인들은 그런 타입이에요.

그런데 그건 한국 전쟁 이후 고생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있었어요. 60년대 [남한은] 아주 가난했어요. 그래서 살기 위해 기를 써야하고 경쟁은 아주 높아요.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공부를 하려고 스스로를 세게 밀어붙였죠. 그래서 세대를 걸쳐 내려온 어려운 삶,  즉, 중국과 일본, 러시아, 이후엔 미국에 이르기까지아주 오랫동안 외세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항상 다시 반격하는 그 삶을 사는 동안—이 모든 것들이 한국인들을 조금씩 시멘트 타입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시멘트요. 거친 유형.

저는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내를 알아요. 그는 47살이고 그가 [그의 일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그는 일을 그냥 계속 해요. 그를 그냥 보면, 놀라워요. 저는 그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래전에 저는 차체 수리소를 했고 저는 기계에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차를 조립 할 줄도 몰랐어요. 카뷰레터가 있었는데 그건 너무 복잡했어요. 저는 그걸 꺼내서 분해하고 여기 저기 신문지를 놓고, 마침내 모든 것을 분해하고, 깨끗이 닦고 다시 끼워 넣었어요. 저에게 몇가지 부품이 남았는데 어디에 들어가는 부품인지 모르겠는거에요. 결국 포기했죠. 저는 누군가에게 그걸 고쳐달라고 돈을 많이 썼어요. 아니, 아니,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채 일하는 게 항상 통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성공할 때도 있어요!

[Portions of this interview are taken from “When a Fireball Drops in your Hole: Biography Formed in the Crucible of War.”  In Koreans in America:  History, Culture and Identity, ed. G. Yoo (San Diego, CA: Cognella Academic Publishing, 2012) 27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