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팍

독립 이후 잠정적인 정부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의 두 정당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왼쪽에는 공산주의가, 오른쪽에는 아시다시피 민주주의였어요. 그래서 양쪽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었어요. 그때는 정치적 혼란이었어요.

세대: 1세대
인터뷰 장소: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
인터뷰 진행자: 램지 림 인터뷰

미군정

독립 이후 잠정적인 정부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의 두 정당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왼쪽에는 공산주의가, 오른쪽에는 아시다시피 민주주의였어요. 그래서 양쪽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었어요. 그때는 정치적 혼란이었어요. 그리고는 그들은 서로를 죽였죠. 그들은 서로를 탓하면서 죽였어요. 권력 투쟁이었죠. 그래서 많은 마을에서, 살인이 계속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고발당했어요. 죄 없는 사람들이종종 죄를 뒤집어썼지요. 만약 누군가가 친구라면, 무언가를 했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모이곤 했고,  그러다가 그들은 그 사람을 의심하고, 그 사람이 무언가를 음모한 것이 되는거에요. 아버지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고  친구가 아주 많으셨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언가로 고발당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무고한 시민이셨어요. 그런데 아버지 친구분 중 하나가, 우리는 같은 마을에 있었는데, 그 분이, 뭐 잘 모르겠어요, 저는 여전히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 앞에서  사람들에게 맞아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겁에 질리셨는데, 왜냐하면 그 분이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친구분이셨고, 그래서, 아시겠지만, 아버지는 도망치셔야 했어요. 만일을 대비해서요.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

그리고 어느 날, 저는 그 날을 절대 잊지 못할 거에요, 어느 날, 비행기가 아주 낮게 날고 있는 거예요. 그 당시에, 제 생각에 농민들이 논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저는 모든 한국인 농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그러면 폭격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저는 그때는 이 사실을 몰랐고, 나중에야 알았어요. 농민들은 제가 머물고 있는 곳 근처 논에서 그냥 일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거에요. 그리고 전, 저는 생각했죠, 내가 폭탄에 맞겠구나. 그건 비행기 한대였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날아와 아주 낮게 지나가는 거였어요. 그들은 심지어 농민들을 볼 수도 있었어요, 심지어. 그런데도 어쨌거나 그렇게 한 거에요. 저는 정말, 바로 밑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텐트가 있었고, 텐트는바위로 만들어져 있었거든요. 저는 그냥 손을 바닥에 붙이고 거기에 있었어요.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한번도 그만큼 무서웠던 적이 없어요. 네, 그건 지독한, 제가 절대로 잊지 못할 지독한 경험이었어요.

우리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유엔 캠프가 있었어요…모든 유엔 국기들이, 모든 국기들이여기저기 걸려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포로들은 안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는 수많은, 여러 종류의 병사들을,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수많은 병사들을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죠. 그들이 우리에게 폭격을 가했다는 착잡한 느낌이 드는거에요… 그들이 폭격했어요. 반신반의했어요. 저는 어렸고. 저는 그 어떤 정치적 판단같은게 없지만, 의문이 들었어요, “왜? 왜?” 아마도 이건 나중에 든 감정일지도 몰라요. 네, 뒤돌아 생각해보면, ,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했어요. 그들은 좀 더 신중했어야했어요. 우리는 의문이 들었어요: “왜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격을 가하는 거지?” 그리고, 뭐, 아마도 제가 너무 어릴 때라 그럴 수도 있는데, 왜 미국인들이나 유엔이 도시 전체에 폭격을 가해야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그들은 그들이 죽인 적들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어요. 네, 네. 도시를 폭격했다고요—당시에 제 마음 속에 많은 의문들이 들게 했어요.

제 생각에는 그건 정치였던 것 같아요, 그것도 국체정치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만,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잖아요. 그들은 그들의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기 있는거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아요. 그들은 정말 누가 “북”이고 “남”인지 신경 안써요. 그들은 그냥 자기 일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과에 상관 없이그냥 그럴 수 있었던 거예요. 네, 그들에게 있어서 “북” [이나] “남”은 상관이 없어요—아마 그들이  다리 중 하나를 끊었던 것 것 같아요. 그들은 다리 하나를 파괴시켰어요. 그게 그들이 해야할 일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한 것일 뿐이에요.

저희 어머니의 가족들은 농민이었어요—오직 농사였죠. 그래서 저는 집에서 일 했어요. 저는 그냥 했어요—남동생들을 돌보고, 아시겠지만, 제 여동생을 기르는 것을 돕는거요. 저는 책임을 맡았고 그리고…저는 제 어머니를 돕고 싶었어요.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고, 그리고 저는 제가 여기서 나이가 더 많으니까, 맏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밥 짓는 것은—근대적인 요리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지피고 유리를 할 수 있는 관목, 나뭇잎 같은 것이 있어야 했어요. 저는 나무를 자르는 것 같은 일을 할 힘이 없었어요. 저는 아직 작았고, 그런 건 못 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잔가지들을 꺾어왔어요.  저는 두 동생들을 데리고 갔죠. 때로는 제 동생들에게 매질을 했어야 했는데 걔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에요. 걔들은 너무 어렸고 별로 많이 할 수가 없었지만 모든 마을 아이들이 다 그랬어요. 그게 아이들의 일이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산으로 가서 모든 나뭇잎이랑 잔가지들을 모아오는 거지요. 그래서 밥을 짓고 집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집으로 가져오는 거에요.

저는 일정량의 나뭇가지와 잔가지들을 모아와야 했기 때문에, 동생들을 나뭇가지로 때렸어요. 제가 너무 동생들에게 엄격해서, 특히 당시에 툭하면 울던 7살짜리 동생한테 너무 심하게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게 저의 주업무였어요. 모든 물자들이 거기에 있도록 확실히 하는거요.

그리고 가끔 사람들은부잣집에 가서 일해주고 돈을 받기도 했어요. 저는 그걸 기억하곤 했지요. 저는 어렸고 아무도 저의 노동력을 사려고 하지 않아서 전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에게] “제가 얼마큼 할 수 있는지 보여줄테니까 그리고 나서 저에게 말씀하세요”라고 했지요. 논을 경작하면, 모를 심어야해요. 그래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 심을 수 있느냐 얼마나 많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본인의 노동력을 알려야했어요. 그때 전 열두 살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절 시험했어요. 절 시험해보고 그들은 저의 노동력을 받아주었어요. 네, 네. 제 노동력은충분히 괜찮았고, 그래서 제가엄마를 대신해서 일했어요. 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엄마를 돕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어요. 저는 항상 제 딸에게 말해요—그 애는 조각이에요 [sic]. 우리가 가난했을 때,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희망을 잃은 적이 없어요. 그건 항상 희망이었고 제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논 사이로 걸어가면서—사실상 몸이 다 젖었죠—그리고 멀리 다른 논밭을 보다 보면, 끝없는 희망이 제 마음에 밀려오면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아직도 제게 기회가 주어졌던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해요. 뭐, 아마도 그건 엄마로부터 온 것일거에요. 저는 당시에 그 어떤 것도 분석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없었지만, 그리고 자연은 그 자체로 제게 아름다웠고, 저에게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런 깨달음을 주었어요. . 아무리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그 모든 것을 함께 놓아보면…저는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이요. 그게 정확히 제가 느꼈던 감정이에요.

뭐, 제 어머니는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제 어머니께서는, 정말 구십세 까지도 굉장하셨어요.마흔 살 이전까지 어머니의 삶은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남편은 항상 들락날락 하고, 어머니께서는 집에 머무시며 부모님과 아이들을 돌보셨어요. 어머니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하셨죠. 저는 그게 얼마큼의 체력—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유지했던 놀라운 힘—으로 가능했던 건지 몰라요. 많은 사람들이 불평없이 이와 동일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요.우리 엄마가 그러세요—정말 절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으셨죠. 정말 내일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는 거예요. 저는 불평했죠. 제 말은, 저의 분노를 내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 그렇지만 어려움이 올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더욱 더 강해지셨고 거기서부터 더 나아가길 결심하셨죠. 그 투지는 그저 놀라웠어요.

전후 시기

제가 서울로 돌아온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해요. 그때 저는 걷고 있었고, 많이 걸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서울 대학교에서 [unclear]까지 죽 걸었어요.걷기에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고, 건물들은 약간 복구되었는데, 개 중에는 복구되었고, 어떤 것은여전히 파괴된 채로 남아있고, 저는 전쟁이 완전 끝났다고 느꼈고, 그래서 신께 기도했어요. “결코, 두 번 다시는. 절대 두 번 다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안돼요.” 네, 저는 여전히 그것을 완전히 과거의 일로 묻어두지 못하지만,이따금씩 망령처럼 그 기억들이 떠올라 저를 괴롭혀요. 그래도 우리는, 다른 여러가지 일들을 하느라 너무 바빴어요.

미국에서의 삶

이따금, 저는 제 딸에게 말해요. 약 사 년전, 제 딸과 같이 캠핑여행을 갔는데,  오레건주 아이다호 강에서 콜럼비아 강까지 죽, 그리고 몬타나, 와이오밍까지 가는 일정이었어요. 그게 약 열흘이 걸렸어요. 그래서 저는 저의 과거에 대해서 얘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죠. 그리고 제 딸은 넋을 빼고 들었죠.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고, 제 딸애는, “엄마, 엄마는 책을 써야해—엄마의 삶에 대한 책”이라고 했어요. [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누가 내 책을 읽겠니?”

네, 그렇지만그 말에는 제게 영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그러고보면 전쟁과 제 경험은— 아무것도 아닌거라고 할 순 없는 거예요. 제 말은, 다음 세대는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할거라 하더라도, [이 경험이] 헛되이버려지는 건 아니니까요. 여전히 거기 있을 거예요. 제 말은, 저는 특정한 시간에 있었고, 특정한 경험을 했어요. 그 시간은, 그건 사라지지 않아요. 그건 지워지지 않아요. 그리고 [만약] 그 시간을 표현하거나 그 경험을 다른 세대의 어떤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언젠가 이걸로 부터 무언가를 얻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건 완전히 헛되거나 그 누구도 정말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다음의 새 천년을 위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