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숙

원인숙은 일본으로부터의 한국의 독립에 이은 혼돈을 기억한다. 그녀는 전쟁 동안 두명의 오빠를 잃은 심적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세대: 제 1세대
인터뷰 장소: 캘리포니아 로우랜드 하이츠
인터뷰 진행자: 디앤 볼쉐이 림과 JT 타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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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저는 국민학생이었죠. 꽤 정상적인 환경이었어요. 제 큰오빠는 좋은 가장이었죠. 큰오빠는 사업가였는데, 수완이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부유하게 살 수 있었어요.

1945년 한국이 해방되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한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공산주의가 압도적으로 퍼지고 있을때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죠. 많은 젊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좋아했어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사는거죠. 그래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죠.

제 오빠들도 그런 류에 속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오빠는 그 활동에 가담했는데, 아주 강력한 공산주의 관념자들 그룹이요. 그들은 어떤 모임을 조직하고 모이곤 했어요.

그리고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누가 공산주의 활동가들인지 식별했고, 그래서 제 큰오빠가 잡히고, 그래서 감옥에 간거에요.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어요. 3년 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서울로 왔어요. 제 큰오빠가 집에 왔어요. 오빠는 자유가 된 몸이었는데, 이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해서 이미 석방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몇 시간 만에 집을 나섰어요. 오빠는 공산당 군부대에 가담했어요. 오빠는 떠났어요.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오빠를 본 겁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저의 작은오빠가, 며칠 뒤에 집으로 왔어요. 이미 공산주의가 오빠의 마음 속에 이식된 상태였어요. 작은오빠는 21살이었어요. 오빠는 이미 공산주의 신문 기자였어요. 그리고 오빠는 커다란 쌀 포대를 집에 가져왔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오빠는 금방 떠났어요. 왜냐하면 오빠가 공산주의 게릴라 집단에 가담해서 서울 남쪽으로 대략 4시간 정도 거리의 지리산으로 갔기 때문이에요. 오빠는 그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죽었으니까. 오빠는 그저 스물 한살이었어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요.

서울은 고립되었어요. 서울은 세 달동안 고립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 거의 죽어가고 있었어요. 배급 쌀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아버지는 제 언니네 가족이 살고 있었던 개성으로 가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맥아더장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들은 와서 서울을 점령하고 북으로 전진했어요. 그 교전지역에서, 아버지는 오시는 길이었거나 개성에 남으셨을 거에요.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 결코 알 수 없었어요.

우리는 가장이 없었죠. 가장의 역할을 떠맡을 남자가 없었어요. 곧, 일할 기회가 제가 찾아왔고, 그게 정말 제 미래에 대한 문을 열어주었어요. 저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했어요. 그래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제 돈을 개인 성악 교습에 쓸 수 있었어요. 그게 제가 공부하고 이루고싶던 유일한 희망이에요.

하지만 저는 슬펐어요. 심지어 제 결혼식에서도 저는 여전히 짓누르는 슬픔을 느꼈어요.

오랫동안 저는 제 오빠들이 공산주의자였다고 남에게 말하기를 주저했어요.  말할수 없었죠.

저는 말할 수 없었어요. 사회가 공산주의에 반대했거든요.

하지만, 더이상은 안되겠죠. 그래야 내려놓을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