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희

이도희는 전쟁 전 빨갱이라고 오명된 제주도민들에 대한 4월 3일 대학살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젊은 세대가 침묵의 벽을 무너뜨리기고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활발하게 찾기를 권고한다. 그녀는 그녀의 조부모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것에 애통해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늦게 얻은 것에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세대: 제 1세대
인터뷰 장소: 캘리포니아 로스 앤젤레스
인터뷰 진행자: 디앤 볼쉐이 림과 JT 타카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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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전시기

제 이름은 이도희이고 공연예술가이에요.

제 아버지의 성함은 이욱이고, 저희 어머니 성함은 강명숙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두 분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그러나 아는 것은 저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라는 점이고, 아버지는 저보고 그걸 항상 기억하라고 그러셨어요. 외가쪽은 제주도에서 오셨고, 저 또한 제주도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요. “너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셨다.” 아버지는 그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셨죠. 저희 외조부모님은 제주도 4.3 사건을 겪으셨어요.

할아버지는 1910 이전에도 독립운동가셨어요. 일본은 한국을 50년 동안 점령했죠. 더 긴 역사를 보면 저의 증조할아버님을 볼 수 있어요, 그 분도 운동을 하셨어요. 저의 조상들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최근에 알게 된 사실들이었죠. 아버지가 말씀했어요,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농민운동에 큰 역할을 하셨다”고. 아마도 저의 할아버지가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배운거겠죠.

제 성은 이 씨에요. 연남 이 씨죠. 연남 이 씨는 한반도의 북쪽,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유래했어요.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북쪽에서 온 분들과 엮여있을지 추축을 하며생각해봤어요. 제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역시 여느 연남 이 씨들과 같이 내려와서 마침내 전라도에 정착한 것이에요. 그래서 제 아버지는 전라도 태생이고, 강점기가 오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직업군인이 되셨어요. 아버지는 1943년에 태어나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에 – 누구 정권이었죠? – 아마 박정희 정권 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을거에요. 그 당시에 저희 아버지는 서울에서 직업 군인으로 일하고 계셨는데, 제주도로 발령을 받으셨어요. 그 때 저희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게 된거죠.

미국 세력이 남한으로 들어섰을 때 일본의 정책과 거의 유사한 정책을 투입했어요.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거의 없었어요. 그냥 교체만 했어요. 반일감정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을 많이 옹호했어요 – 미국이 남한의 자유를 지지해준다고 생각하며 한국전쟁에 찬성했으니 결국은 이승만 정권을 옹호한거죠. 그게 진짜 미국을 옹호한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 기회를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저희 어머니는 제주도 4.3사건을 기억하세요. 엄청나게 심각한 대학살이었죠.

외할아버지는 도박을 하셨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도박한다고 늘 불평하셨지만, 사실은 그게 가족을 구한 것이에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을 때 대다수의 제주도민들은 이승만에게 반대했어요. 그래서 이승만은 제주도를 공산당의 섬, “빨갱이” 섬이라고 불렀죠. 미국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의 표적은 남자들이었죠. 집집 마다 찾아가서 남자들이 집에 없으면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어요. 한번은 남한군이 집을 찾아와서 외할머니에게 남편이 어딨냐고 물었대요.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도박하러 나갔다고 했고요. 그들은 외할머니를 믿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 외할아버지가 있을 때에 되돌아왔어요. 그들은 외할아버지에게 어디를 갔었냐고 물었고, 외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도박을 했다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벽에 줄지어 서서 살해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었죠. 군인이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없으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람을 죽였어요. 어머니의 가족은 살아남았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 한 상황 속에 뭣을 겪고 어떻게 생존했는지 가늠 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 이갸기를 용기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만일 평생 비밀로 간직했다면 어땠을까요?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당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저는 제주도로 갔었어요.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었죠. 제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군대를 가야해서 육지로 이사를 했어요. 저희는 참 많이 이사를 다녔어요. 하지만 매년 제 고향이자 외조부모님이 계신 제주도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전 단 한번도 외조부모님에게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어요. 단 한번도요. 이웃들 사이에 암묵적인 침묵이 있었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요.

한국 전쟁

정말 흥미로운 것은 지역적으로 보는 조상의 혈통이에요. 혈통이 북에서 남까지 많은 지역에서 유래했을테니, 저 또한 제 선조들과 지역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겠지요. 제 아버지의 형이 또한 학생운동에 참여를 해서 당신의 아버지, 즉 제 할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셨어요. 아마 아버지의 형이 고등학생이었을 때였을 거에요. 한국 전쟁 중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순간에 집을 나섰죠. 북쪽 군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오고, 남쪽 군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어떤 친척들은 일제강점기에 반대하고 이승만을 지지했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당시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으로 갈라져있었어요. 제 부모님과 제 조부모님, 그리고 삼촌은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었던 것 같아요. 북쪽이 내려왔을 때 그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체포했어요. 다행히 저희 할아버지는 석방되었지만, 삼촌은 아니었어요. 딱 그 때 UN세력이 들어와서 남한의 조력자 역할을 했어요. 그들이 폭탄을 떨어트렸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너희 삼촌은 운이 정말 좋았다. 폭격이 탈출을 도왔으니 말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뭐가 뭐고 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더욱 혼란스러워졌어요. 이건 아직까지도 개인적으로 어려운 부분이에요. 아마 사람들도 누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파악하려고 하고 있어요. 매우 흥미롭죠.

1950년도 당시에 아버지는 경주에 계시고 어머니는 제주도에 계셨어요.

아버지는 당신 형의 이야기만 해주셨어요. 삼촌 이야기만 아빠에게 들었어요. 어머니는 당시에 너무 어렸어요 – 3살 정도셨을거에요. 그래서인지 딱히 기억 하는 것이 없으시고요.

세대간 유산

후에 자라면서 역사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왜 모두들 쉬쉬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본인 아이들이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본인들의 이야기를 해줌으로서 아이들이 고통 받을까봐 걱정을 하고 공유하지 않은 것이지요. 정책적으로 가족 중 누가 공산당과 연루되어있으면 그 혈연 관계 때문에 직장을 얻을 수 없어요. 마치 범죄자가 된 것 같은거죠. 그래서 그들이 침묵했을 수도 있어요.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과거 업적을 드러내서는 후손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요.

이 정책은 이름이 있어요. 엄청난 침묵을 형성했죠. 그러한 것이 강정(제주도의 도시. 현재 해군기지 공사로 인해 마찰이 있다)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요. 이미 이러한 일을 한번 경험해봤기에 주민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하느냐를 알고 있죠.

제가 어릴 때는 침묵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나가서 해산물이나 먹고 바다에서 놀았죠. 자연에 둘러쌓여서 할 것은 많았어요. 이런 이야기들에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자라고 나니까 호기심이 생겼어요. 질문들이 생겼지만, 이미 늦었었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셨거든요. 조금 늦은 깨달음이었어요. 조금 일찍 깨달았다면 아마 조부모님과 여러 가지를 공유할 수 있었을 거에요. 당신들의 삶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왜 그렇게 침묵을 지켰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의 자식들과 손주들을 생각해줬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었을 거에요. 가끔은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까지 안 줘도 되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주고 베풀었거든요. 이제야 이해가 가고 조부모님에게 뭔갈 베풀고 싶어요. 재밌게도 선조분들이 제가 미국으로 이민올 때에 저에게 왔었어요. 그래서 저를 미국으로 보내신건가봐요. 모든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하고 세력 싸움의 씨를 뿌린 미국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차츰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어요. 성장했죠. 점점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생겼어요, 미국 내 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하고요.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들의 인생에서 뭐가 중요하고 왜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고찰이 많은지 알게 되었어요. 그건 늦은 깨우침이었어요. 제 자신을 돌아봤죠. 나는 누구일까?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들은 결국 다시 선조들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이 모든 관계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모순적이죠. 나 스스로를 외부에서 바라봐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요. 나와 타인, 그리고 나와 국가의 관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죠.

멕시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은? 여러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에 노출되고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죠.

저는 1974년 제주도에서 태어났어요. 저희 아버지는 군인이라서 제 인생은 송탄동 오산시에 있는 기지에 보냈어요. 그런 환경에 있을 때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많은 군인들과 함께 자랐죠. 저희 아버지는 제가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마찰이 많았죠. 대학교 다닐 때 저는 서클에 활동했고 많은 시위에 참여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것에 대해 많이 속상해 하셔서 몰래 했어요. 풍물을 즐겼죠. 그래서 풍물단에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점점 제 예술에 빠지면서 제 주변에, 사회에, 그리고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디서 왔는지, 부모님과의 제 마찰, 나라를 섬겨야하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의 처지에 대해 차츰차츰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예술가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져야할 부분에 대해 아버지에게 늘 질문을 했죠. 역사와 아버지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어요. 제가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를 조금 했더니 아버지가 말씀 하셨어요, “북한을 간다면 너와 나는 더이상 부녀지간이 아니다.” 굉장히 극단적이죠. 그냥 감당을 해야했어요. 물론 굉장히 슬펐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 해 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없었어요. 세뇌를 당하고 나면 그 굴레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워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살펴보기가 어렵죠. 왜냐하면 군대에서 30년 넘도록 보낸 것이 그의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에요.

질문자: 북한사람들이 세뇌를 당했다고 많이들 그러는데, 세뇌에 대해서 더 말씀해주세요.

흥미롭네요. 군대와 비슷하게 선과 악의 양극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선이다”라는 교육 때문일 수도 있어요. 중간지점이 없죠. 이건 옳은 것이고 저것은 그른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간다면 너는 끝이다..

제 정치적 깨우침은 제 자신을 이해하는 정체성과 비슷해요. 그때부터 제 조부모님과 그들과 연관된 땅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것 같아요. 그 사람과 그 땅하고 제가 끈을 맺게 되면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역사지요. 너무도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파헤치는 것. 땅을 파는 것 같아요. 성노예로 이용된 여성들의 이야기와 한국전쟁의 역사가 왜 제게 그리 중요한지 묻고 이해하는 것이 곧 땅 속 깊은 것을 발굴해내는 것과 비슷해요. 제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에요. 이 땅은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제 정체성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죠. 제 정체성은 아직도 형성되는 중이에요. 제 자신과 이 땅을 설립하고 역사를 만든 제 선조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남은 반쪽의 한국도 알고 싶어요. 한 쪽의 땅을 이해하니까 나머지 한 쪽의 땅, 나머지 반 쪽의 제 정체성 역시 알아야할 것 같아요. 그러니 사실은 정치적인 것 보다도 저 자신과 제 스스로의 정체성의 문제지요.

저희는 젊은 세대에요. 한국전쟁은 저희 삶의 일부가 아니었죠. 그러므로 관심을 갖지 않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쉽지요. 하지만 제게는 제 정체성이 알아야 할 역사를 떠올려요. 제 부모님과 그들의 부모님과의 연결 – 그 연결이 쭈욱 조상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을 안다는 것. 그 것이 바로 한국의 땅이에요. 그래서 제 성 씨가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알아보는거에요. 북쪽에서 유래 된 성씨더라고요. 저는 북쪽, 혹은 중국에 뿌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 이 땅덩어리가 연결 되어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 혈관, 이 혈통을 따라서 봐야만 무언가가 절단되고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후에 제 여동생과 복쪽에서 온 매제와 그의 부모님, 그리고 조카의 조부모님과 지낼 때 그 연결고리가 뭘까요? 저는 그들에게 마음이 가요. 이 땅을 제 몸으로 생각하고, 몸이 잘라지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을 하는 거에요. 어떻게 해야 이 땅을 만지고 공기를 맡고 바람을 느낄수 이는지, 통일이 되면 어떤 느낌일지 꿈을 꾸는 거에요. 또다른 질문으로 시작하겠지만, 저는 그 질문을 반드시 하고 싶어요. 한번 경험해보고 싶어요. 궁금해요.

미국 시민권을 얻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언젠가는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서였어요. 직접 보고 느끼고, 상상할 필요도 없이 제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체험해보고 싶어요.

북한 여성들이 온전히 인권을 가지고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미국 사회도 가부장적이고 여자들은 고통 받고 희생을 강요 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북한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로서 저는 여성과 아이들이 자유의 권리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권리를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고, 그게 실현 가능하게 하려면 제가 뭘 어떻게 도와줘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예술가로서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예술로 제 자신의 소망을 표출하고 공유하는 것이죠.

무용과 음악, 그리고 약간의 미술을 이용해서 예술 활동을 해요. 이 세가지 모두 굿과 같이 한국에서 온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한국 영적 전통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제가 누구고 이 예술을 왜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도와줬죠. 제 예술을 이 이야기들, 이 땅, 그리고 관심이 필요한 문제점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요. 제가 공유하는 이야기들 중에는 제 자신의 이야기도 있어요. 여자로서 성노예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국 여성으로서 한국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인 여성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살면서 한미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다 깊이있게 무당의 기력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당의 기력에 대해서 연구를 깊이 할 수록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와 여성 이민자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죠. 다른 아시안 계통 이민자들과 함께 그들의 이민 경험, 그리고 객지에서 우리들의 통합적인 정체성을 통해 우리들만이 만들 수 있는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민여성과 함께하는 것이 제 다음 단계에요. 남과 북처럼 땅을 연결 시킬 수 있는 다음 단계를 찾고 있죠. 할 것이 많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참된 이해로 다가 가는 거지요.

질문자: 북한으로 갈 계획이 있나요?

모르겠어요. 어쩌면 2017년이나 2018년에 갈 수도 있어요. 지금으로써는 꿈일 뿐이에요. 지금으로써는 그 일이 실현 될 수 있도록 씨를 심어두고 있죠. 어쩌면 무슨 혈연관계가 있을 수도 있어요. 오래된 혈연관계나 족보를 찾기는 정말 어려워요. 전쟁 후에 모든 자료들이 불탔으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정말 힘들어요. 그에 대해서 알지만 족보를 찾을 수는 없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북한을 주제로 한 그림 경연 대회가 있었어요. 북한은 빨간 늑대로 그려야했어요. 일종의 세뇌지요. 모두들 같은 것을 해야했어요. 북한에 대해서 굉장히 또렷한 인식이 있어야해요. 사람도 아닌 빨간 늑대인 것이에요. 어릴 때 부터 그렇게 세뇌를 당하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미국은 하얀 양으로 표현된다는 것이에요. 정말 웃기죠. 굉장히 평화스럽고 얌전한 모습이죠. 대조적으로 북한은 빨간 늑대로 굉장히 야만적이고요. 매년 이 주제로 글짓기와 그림그리기 대회가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자랐어요. 북한은 나쁜 놈들이라고 배웠어요. 수상쩍은 사람을 보면은 112에 전화하라는 전단지가 투성이었어요. 아직도 호출해야하는 번호가 있어요. 자라면서 가지게 되는 생각이고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죠. 풍물을 함으로서 그 사고방식을 깨고 나와서 진실된 역사를 찾고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제가 몰랐던 이야기와 역사를 정말 알게 된 것이죠.

질문자: 선생님들이 정말로 북한을 빨간 늑대로 그리라고 했나요?

예시를 보여줬죠. “이게 작년 1위한 작품이다.” 상상을 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보여줬죠. 처음 부터 굉장히 확고한 인식을 심어줬죠. 상상력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어요. 특정 이미지를 주고, 특정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렇게 항상 유도된 사고를 하니 상상이라는 것을 하기가 어렵죠.

젊은 세대로서 저는 우리 모두가 질문을 떠올리고 상상을 했으면 좋겠어요. 티비에서 보는 뉴스가 아니라요. 정말 간단한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질문을 던져봐야해요. 심오한 것이 아니라요, 그냥 자연과 새로운 지역에 대해서 반응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의 사람들은 어떨지 무엇을 먹고, 어떤 제철 음식을 먹는지 등 이러한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결국은 여러 가능성을 열죠. 젊은 세대가 궁금증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부모님과 조부모님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고 그들의 추억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막상 질문을 하게 되면은 사실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은 적을 것이에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이에요 – 직접 물어봐야하는거에요. 그럼으로써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에 대한 또 다른 연결고리가 생기는거에요. 젊은 세대는 북한과 접촉을 해본 적도, 한국전쟁을 경험해 본 적도 없죠. 하지만 그대로 남아있고 그들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연결이 되어야해요. 연결이 되려면 그들에게 직접 가서 질문을 해야해요. 그래야만 역사와 그들의 삶, 그리고 이 땅과 자기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질문자: 아버지가 연을 끊는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을 갈 의향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가기 전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요.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찾고요. 듣고 자기 감정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이든 반감을 갖지 않는 것 – 호기심이라는 것이거든요. 저는 궁금한 것이고, 제 호기심이 전달이 된다면 어쩌면 아버지도 당신의 의견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어요. 그 의견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들어야겠어요. 그 방도가 무엇일지를 궁리해봐야할 것이고, 부디 부모님이 저를 이해해줄 수 있는 방향을 찾았으면 해요. 제가 가진 지식은 굉장히 짧고 얕기 때문에 아마 직접 경험을 하신 나이드신 분들이 더욱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 분들이 제가 더 많이 이해를 할 수 있게 뭔가를 덧붙여서 저를 도울 수 있다면, 저는 그 이야기들을 반드시 들어보고 싶어요.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게 현재까지 어떤 여파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이야기를 했죠. 우리는 흔히 역사는 그냥 과거일뿐이라 생각하지요, 마치 어디 상자에 넣어서 뒤켠에 놓아두는 것 처럼.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역사는 이어가는 이야기에요. 저희는 동시에 지금 진행되어가는 이야기와 역사 내에서 매순간 살고 있어요. 과거의 역사와 지금 이 순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이미 미래를 살펴본다는 것이죠. 이 순간으로 모든 것이 돌아오고 있어요. 강정의 모습은 곧 미래이기 때문에 강정의 현상황을 이해하려면 제주도 4.3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고로 시간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던 이야기들의 상관관계를 이해해야해요. 그 이야기들은 들어야 하는 것들이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대면을 해야만 현재 상황을 뒤집을 수가 있거든요.

저는 제 선생님 안나 할프린에게 늘 감격해요. 그분은 늘 평화를 위해 춤췄어요. 그녀는 이스라엘에 가서 평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여성들과 일해요. 손끼리 마주잡고 있는 목걸이를 늘 하고 다니죠. 그분의 작품과 헌신을 목격했을 때, 저는 제 나라가 제 가슴에 담겨져있고 제 헌신과 예술이 조금이라도 평화에 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어요. 한반도, 남과 북, 그리고 제주도는 모두 제 몸과 마음에 담겨져있어요.

대학살이 이뤄지던 제주도 4.3사건 당시에 할아버지가 도박을 하고 있을 때 군인들이 찾아와서 물었어요. “당신 어딨었고 누구랑 있었냐?”고 묻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그 자와 있었나? 몇시? 어디서?”를 물었죠. 대답들이 서로 말이 맞아야했어요. 만일 맞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총살 시켰죠. 총살당한 많은 사람들이 돌담을 등지고 서있었다고 어머니는 조부모님께 들었대요. 제주도에 가면은 그 돌담을 볼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었어요 – 줄지어 서서 총에 맞아서 죽어나갔죠. 그 때 살던 제주 사람들 – 남자든 여자든 청년이든, 소년이든 소녀이든, 공산주의자를 지지하거나 혹시 자기들이 공산주의자일 수도 있었지요. 많은 혼란이 있어요. 누가 누구인지 모르죠. 누군지 불확실하면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냥 죽여버리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어요. 심지어 아기들까지도요.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죠. 따옴표 사이에는 끔찍한 말들이 있었어요. “다 죽여버리라 – 빨갱이의 섬이다. 죄다 죽여버리던가 서로가 죽이게 하라.” “서로를 죽이게 하라”는 말을 보고 [제주도에 열린4.3사건에 대한 전시회에서] 저는 눈물을 흘렸어요. 이게 정말 미군과 남한정부가 한 말이에요. 그들은 그냥 제주도민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지켜봤죠. 멈춰야해요. 지금 강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에요. 미군은 그저 우리가 서로와 싸우는 것을 지켜볼 뿐이에요.